[조현주의 문화인사이드] 땀은 연극을 배신하지 않는다…연극 '이기동 체육관' 

2024-02-20 16:31:22
연극 '이기동 체육관'의 한 장면.

연극은 연극다운 맛이 있다. 무대는 비록 투박할지라도 깊이 있는 서사, 배우로부터 관객에게 고스란히 이입되는 감정, 연출의 다양한 해석과 표현은 마치 음식을 날것으로 탐미하는 느낌이 든다. 뮤지컬처럼 화려한 기교의 춤과 노래, 눈부신 의상, 색색의 조명과 무대 장치 같은 볼거리가 없어도 날것의 탐미는 연극만의 매력을 선사한다.

연극 작품은 보통 관객들에게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오래 묵은 음식이 깊은 맛을 온전히 내어 주듯, 오랜 작업을 통해 다지고 다듬은 작품은 관객들에게 한층 깊이 있는 감동을 전하기 마련이다. 극단 모시는 사람들이 2009년 초연을 올린 뒤 지금까지 15년 동안 다져진 연극 '이기동 체육관'이 그렇다. 손효원 작, 연출의 이 작품을 2010년 김수로 프로젝트 이후 14년 만에 대학로 한성아트홀에서 다시 만났다.

처음 작품 소재가 ‘권투’임을 알았을 때는 작품 자체가 달갑지 않았다. ‘때늦은 권투 연극이라니’. 권투가 국민적 인기를 얻었던 시기는 1970~80년 대, 지금부터 40~50여년 전이다. 요즘처럼 급변하는 시기에 강산은 몇 번이 변한 것인가. 홍수환이 한국 복싱 최초로 해외 원정 경기에서 챔피언에 오른 것은 1974년, 4전 5기의 신화를 이루며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긴 시기도 1977년이었으니 멀기만 한 시간이다. 맨주먹으로 사람을 공격하고 쓰러뜨리는 권투라는 스포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왠지 어려운 환경에서 권투를 하고 챔피언이 되는 진부한 스토리가 전개 될 것 같다는 편견도 있었다.

연극 '이기동 체육관' 포스터.

그러나 이번 공연 소식을 들으며, 권투를 다시 보게 됐다. 스포츠에는 우리는 하나로 만드는 특별한 힘이 있지 않은가. 얼마 전 축구 아시안컵 소식이 온 매체를 뒤덮은 것처럼. 비록 지금은 비인기 종목이 되었지만, 한때 권투는 가질 수도 배울 수도 없었던 대중의 삶에 위로와 희망을 주었던 스포츠였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힘찬 응원 대상이었다. 권투는 맨주먹으로 사람을 때리는 잔인한 경기가 아니라, 맨주먹 두 개 만으로 세계 정상에 오르는 모습을 보여준 희망 그 자체 였다.

"권투는 정직한 거야. 평등하지. 똑같은 체중에, 똑같은 기술에, 똑같이 빤스만 입고 한 판 뜨는 거야"라는 대사가 마음에 남는 이유다.

연극은 이 권투라는 소재를 현재의 시점에서 진정성 있게 보여주었다. 진부하지 않았다. 삼양체육관 관장이자 전직 복서 이기동과 지금은 회사원이지만 어린 시절 이기동 선수를 영웅으로 생각했던 동명이인 청년 이기동을 중심으로 복서를 꿈꾸는 관장의 딸과 체육관 코치, 로봇을 좋아하는 노총각과 동네 노처녀, 보험사 만년대리, 열혈 고등학생 등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소소한 일상을 코믹하게 엮어가며 사랑과 삶에 대해 소박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전한다.

무엇보다 장면마다 보여주는 배우들의 노력은 ‘우와’하는 감탄을 불러일으킬 만큼 대단했다. 특별한 연습과정 없이는 해낼 수 없어 보이는 권투 동작과 운동으로 가꿔 낸 탄탄한 몸으로 권투 선수의 면모를 완벽하리만치 표현했다. 작품의 몰입도를 높이는 중요한 요소였다. 샌드백을 때리는 날렵함, 펀치 볼의 탄성, 기교 넘치는 줄넘기 등에서 보여주는 건강한 에너지는 작품을 더욱 힘 있게 이끌었다. 

특히 마지막 모든 배우들이 등장해 끈질기게 줄넘기를 넘는 장면은 작품을 뇌리에 각인시키며 진정한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일상에서 쉽게 만났던 줄넘기는 이 장면을 통해 삶의 지혜를 안겨 주었다. 수많은 어려움이 내 앞에 다가오더라도 넘고 또 넘어 강인한 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특별한 운동이라는.

연출은 ‘각자의 삶에 대한 애환이 새로운 힘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고, 이를 통해 관객들도 분명 새로운 힘으로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건강한 변화를 마음속에서 맞았을 듯 하다.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다. 작품에서 배우들이 흘린 땀은 무대를 빛나게 했고, 분명 그들의 노력을 배신하지 않았다. 요즘 이렇게 정직하게 땀 흘리는 작품을 만난다는 건 행운이다. 스포츠가 전해주는 강인한 힘과 감동까지 통째로 날아든 이 작품.

결국. 연극 '이기동체육관'은 관객들을 배신하지 않는다.

글·조현주 박사(문화콘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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