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사 속 신한은행③] 재일동포의 모국사랑, '新韓은행' 빚어내다
2024-11-13
본보 취재진은 11월12일 서울시 중구 소재 '한국금융사박물관'과 '재일한국인기념관'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금융사 속 신한은행'을 3부에 걸쳐 소개합니다. [편집자주]
우리나라 최초로 민족의 자본으로 만들어진 은행은 어디일까? 바로 신한은행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한성은행(漢城銀行)이다.
1878년 일본 제일은행 부산지점이 세워진 후, 조선에 제18은행, 제58은행 등 일본계 은행들이 줄지어 설립됐다. 홍콩상하이은행, 한러은행 등 외국은행도 있었지만 일본 은행이 가장 많았다. 특히, 일본 제일은행은 한국 최초의 중앙은행인 구한국은행이 설립될 때까지 금융계를 장악했다.
일본을 비롯한 외국계 은행들이 경제를 침탈하자 민족 자본으로 은행을 설립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고위 관료·상인이 중심이 돼 민족 자본 은행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1897년 1월8일, 최초의 민족계 은행으로 설립된 것이 한성은행이다.
◆ 최초의 대출담보, 당나귀
우리나라 최초의 담보대출이 이루어진 것도 한성은행에서였다. 때는 1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구에서 온 한 상인이 여느 가정집처럼 보이는 한성은행을 찾았다. 그는 장사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는데, 사업자금을 빌리기 위해 은행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상인이 맡길 물건이라고는 자신이 타고 온 당나귀뿐이었다. 은행은 고민 끝에 당나귀를 담보로 해 20원을 대출했다. 20원은 당시 은행장의 한 달 월급 수준이었다.
이는 국내 은행 역사상 최초의 담보 대출로 여겨진다. 다만, 돈을 빌린 상인이 이후에 돈을 갚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 한성은행, 국채보상운동에 이바지
1907년 조선은 일본에 1300여만원의 채무를 지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재정을 장악하기 위해 일본이 벌인 화폐 정리 사업의 영향이 컸다. 일제는 대한제국에 일본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고, 제일은행권을 조선의 화폐로 할 것을 강요했다.
그해 2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됐다. 외채를 국민의 모금으로 갚고 경제 독립을 이루자는 취지로 벌어졌다. 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 당시 벌어졌던 ‘금 모으기’ 캠페인과 비슷한 성격의 운동이다.
사람들은 담배를 끊고, 각종 패물·머리채를 팔아 돈을 모았다. 보석이나 옷을 기부하기도 했다. 노인, 노동자, 기녀, 일본에 간 조선 유학생 등 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했다.
한성은행은 국채보상운동의 한 축이었다. 국채보상운동으로 모금된 자금을 예치해 보관하는 역할을 맡았다. 김종한 초대 한성은행장은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의 부소장을 맡으며 이 운동에 참여했다. 김 소장은 각 지방의 수금을 총괄했다.
국채보상운동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언론의 지지를 받으며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일본은 이 운동을 배일(排日)운동으로 규정하고 탄압했고, 이 같은 일제의 방해 때문에 국채보상운동은 종료됐다.
◆ 한성은행서 조흥은행 거쳐 신한은행까지
1943년 한성은행과 동일은행이 합병하면서 조흥은행이 탄생했다. 조흥은행은 한국 최초의 시중은행으로 평가받는다. 코스피 시장 제1호 상장기업(종목코드 000010)이기도 하다.
2006년까지 사업을 이어오던 조흥은행은 재일동포 자금으로 설립된 신한은행에 합병됐다. 신한은행은 ‘금융보국(金融報國)’, 즉 ‘금융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이념으로 세워졌다.
김준하 기자 guyblue@smartfn.co.kr
댓글
(0) 로그아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