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칼럼] '부활절'에 편승한 언론의 기독자 '죽이기'

언론의 자유 앞세운 개인 테러를 규탄한다 
고진현 기자 2023-08-18 13:30:28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막 11:25)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눅 17:4)

“다 이루었다”(요19:30)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숨이 멎는 마지막 순간에 내뱉은 단발마의 비명은 부활로 인해 곧 기쁨으로 승화됐다. 구속사를 완성한 이 사건으로 인해 인류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며,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은 기독교 절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됐다. 

이 땅에서 최초의 부활절 연합예배는 지난 1947년. 1만5000여명의 기독교인들이 한(恨)과 수치(羞恥)의 장소였던 조선 신궁터에 모여 해방에 대한 감사와 교회 재건을 결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첫 번째 설교는 한경직 목사가 맡아 예수 부활의 기쁨과 민족 부활의 감격을 함께 나눴다. 이후 부활절 연합예배는 6·25 한국전쟁과 피난 중에도 지역을 옮겨가며 계속되는 등 성도들의 신앙과 힘을 결집하고 혼란한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뜻깊은 행사였다. 

기독교 최대 명절인 올해 부활절(4월9일) 연합예배가 막을 내린지 넉 달이 지났다. 하지만 교계에서는 뒷말이 무성하다. 미꾸라지 한 마리의 흙탕질 여파가 꽤 오래가는 모양새다. 

한 인터넷 매체의 기자는 당시 부활절 행사를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 범죄자가 중심인 기독교 행사에 들러리 서나?···부활절이 범죄자들의 이미지 세탁에 이용되면 안 돼”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기사라고는 하지만 A원로 목사와 기독교 케이블 TV 운영자인 B장로에 대한 인신공격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완벽하게 동일한 내용’의 그 기사를 동일한 기자가 3개의 인터넷 매체에 ‘같은 날’ 게재했다. 그 저의가 매우 악의적이며 엄청날 것이라는 의심은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개인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넘어, 기독교계 전체가 두 기독자들을 엄호하고 면죄의 판을 깔아준 양 악의적으로 보도한 점은 공분을 사고도 남을 만하다. 여기에다 대통령까지 끌어들여 부활절 행사의 본질을 왜곡·폄하하기까지 했다.

공격의 대상이 된 두 기독자가 설령 과거에 범죄사실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십수년 전에 법적인 심판이 끝났다. 교계에서도 본인들이 회개로 거듭났다고 인정했기에 중요한 역할을 맡기질 않았겠는가.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을 비롯한 모든 기독교인에게 부활절의 의미는 대단히 크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온 큰 의미를 온 인류와 함께 기리고 있다. 비록 신학적 문제와 정치적 이해관계로 때로는 연합과 분열을 반복했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기독교인들의 마음은 모두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긴 결과다. 그래서 용서와 화해와 화합은 곧 성스러운 기쁨으로 연결되는 것 아닌가.

이러한 기독교와 부활의 정신을 외면한 채, 한국교회 최대 행사인 부활절 연합예배에 편승해 특정 개인을 겨냥한 기사 ‘테러’를 벌이는 일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이 교계의 일치된 의견이다. 

다소 늦은 감은 있으나 그 보도의 저의를 파헤치고 법적인 조치까지 따라야 한다는 지적과 함께, 목회자들이 방관하고 침묵으로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비단 문제가 된 기사를 쓴 기자나 그 매체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한국 언론의 짙은 그늘을 다시 보여줬다는 평가가 어쩌면 맞을 것이다. 

언론은 권력이 아니며, 언론 자유가 주관적 횡포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 기자가 결코 벼슬이 될 수도 없고.

잘못된 언론의 그늘에 기독교계가 부활의 빛을 비추어야 할 때가 됐다.

고진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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