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진의 재미있는 K-LCC 이야기] (10)2000년대 후반 금융위기가 K-LCC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김효정 기자2022-11-26 05:59:01
설립 초기의 K-LCC들은 우리나라 항공소비자를 설득하는 작업에 많은 공을 들여야 할 만큼 고난의 과정을 거쳤다. 2000년대 중반에 생겨나기 시작한 K-LCC는 저가항공사라는 별칭으로 비하되었고, 기존항공사의 서비스에 익숙한 우리 소비자들은 LCC의 비즈니스 모델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기존항공사의 거센 견제와 소비자의 몰이해 등 각종 사회구조적 악조건 속에서 찾은 희망의 빛은 의외로 2000년대 후반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2007~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 금융시장에서 시작되어 다른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쳐 전 세계로 파급된 대규모 금융위기 사태였다. 1929년의 경제대공황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경기침체가 찾아왔다.
이 같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소비의 거품이 급속하게 빠졌고 우리사회는 과시형 소비에서 실속형 소비로 바뀌게 되었다. 2000년대 중후반까지 K-LCC의 주요 탑승객은 20~30대 젊은층이었다. 국내선은 물론 일본, 홍콩, 태국 등의 국제선까지 그동안 비싼 항공료 때문에 항공여행은 꿈도 안 꾸었던 젊은층이 K-LCC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에 기존항공사로 충분히 항공여행을 즐겼던 계층은 K-LCC를 굳이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 입장에서 K-LCC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금융위기 이후 소비자 인식이 급변했다. 우리나라 사람의 가치관조차 바뀌었다. 그동안 ‘폼생폼사’ 스타일이었다면 이젠 실속형, 즉 선진국형 소비패턴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이상 ‘저가’가 싸구려가 아닌 실속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당시 백화점보다는 할인점으로 구매처를 급속하게 바꾼 소비패턴과 맞물려 있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팀이 매년 소비라이프 트렌드를 정리하면서 ‘스트리밍 라이프’(streaming life)를 정의한 적이 있다. 이제 누가 더 많이 소유하고 있는 지가 아닌, 누가 더 많은 경험을 해보았는지가 인생의 풍요를 평가하는 새로운 척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금융위기 전에는 소유가 트렌드였다면 이후에는 소유보다는 경험을 중요시하는 세태로 변하기 시작했다는 말이었다.
이 같은 말뜻의 중심에 ‘스트리밍 라이프’가 있다. 스트리밍(streaming)은 음악이나 동영상 파일을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 저장해서 듣거나 보지 않고, 인터넷에 연결된 상태에서 실시간으로 재생하는 것을 말한다. 물 흐르듯이 전송된다고 해서 스트리밍이다. 다운로드와의 가장 근본적 차이는 저장 즉, 소유하지 않고 그냥 일회성으로 ‘경험’한다는 것이다. 무소유다. 회원제로 ‘구독’하다가 언제든 끊을 수 있다.
소유가 아니라 경험한다는 개념의 스트리밍 라이프는 우리 일상의 다양한 영역으로 확산되었다. 물건은 물론이고 집이나 사무실, 자동차, 서비스, 입고 먹고 가꾸는 것, 여가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넓어졌다. 국내 도시에서든 물가가 비싸지 않은 해외도시에서든 ‘한 달 살아보기’를 하는 유행도 스트리밍 트렌드의 일종이다. 과거세대는 마이카, 마이홈이 꿈이었다. 그런데 이후 세대는 욕망은 큰데 경제적 여유는 따라가지 못했다. 인터넷의 발전과 가치관의 변화는 그 타협점을 찾았다. 무엇을 더 많이 가졌는가보다는 얼마나 많은 걸 경험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같은 경험 추구는 항공여행에 대한 인식을 근본부터 바꿔 놓았다. 그리고 항공편 이용이 서서히 단순한 교통수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기내식과 풀서비스를 기대하며 탔던 항공편에서 K-LCC 이용객이 늘며 경험이 쌓여갔다. 특히 젊은층의 유럽 배낭여행 붐 이후 해외 LCC 이용경험이 늘면서 이들 경험자가 K-LCC의 주요한 여론형성자가 되었다. 이들이 블로그 등에 K-LCC 탑승기를 올리면서 아직 K-LCC 이용경험이 부족했던 우리나라 항공소비자의 여론을 주도해 나갔다.
학습을 마친 K-LCC 이용객들은 동남아행 항공편에서 아예 작은 배낭을 메고 탑승했다. 배낭 안에는 기본적으로 간단한 식사류와 음료, 무릎담요, 태블릿 등 K-LCC 탑승 필수용품이 들어 있었다. 이들은 항공편을 교통수단일 뿐이라 생각하고, 항공사의 풀서비스보다는 항공료를 줄이는 데 주력했다. 항공비용을 줄여 해외 현지에서 쇼핑을 하나라도 더 하고, 맛집을 찾아다니고, 호텔을 업그레이드해서 묵는 게 현명한 해외여행이라 생각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해외여행=기내식’으로 인식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기내식 먹은 지 오래 됐다”는 말의 속뜻은 “해외여행 갔다 온 지 오래 됐다”는 의미의 우스갯소리였다. 해외여행의 꽃이 여행지가 아닌 기내식을 먹으며 가는 비행기 탑승 순간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이처럼 우리나라 국민의 항공여행에 대한 오랜 인식이 바뀌자 K-LCC들도 발빠르게 마케팅을 강화했다. 처음에 K-LCC들은 “제주도 가는 데 굳이 기존항공사 탈 필요 있나”라는 여론을 만들어내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이 같은 여론은 설득력에서 주효했다. 이후 제주행 항공편에서는 기존항공사의 점유율을 빠른 속도로 빼앗는데 성공했다. 기존항공사들은 제주행 항공편에서 점유율이 급속하게 빠지자 항공기를 국내선에서 빼내 해외노선으로 옮기는 등 자구책을 썼다.
그리고나서 놀라운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K-LCC 국내선 항공편 승객 중에 연예인이 등장했고, 대기업 오너가 타기 시작했고, 정치인들도 타기 시작했다. 2020년대 시각에서는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 K-LCC 내부에서는 화제가 될 만큼 어색해했다. 제주도를 가면서도 기존항공사의 비즈니스석에 앉아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이 K-LCC를 탄 것이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2021년 상황을 보면,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영향으로 해외여행 대신 국내여행 수요가 늘면서 국내선 여객수는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국토교통부 통계에 따르면 국내선과 국제선을 합친 2021년 항공여객은 3636만명이었다.
이는 코로나19가 본격화하기 이전인 2019년과 비교하면 29.5% 수준이었다. 2019년의 항공여객은 1억2337만명이었다. 해외여행이 중단되면서 국제선 여객수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코로나19 이전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인구 2배 이상이 연간 항공기 탑승경험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연간 항공여객은 2017년 1억936만명, 2018년 1억1753만명, 2019년 1억2337만명으로 매년 꾸준히 늘다가 코로나19 이후 2020년에는 3940만명으로 급감했다. 코로나19 이전에 항공여객이 4000만명 이하를 기록한 때는 국제통화기금(IMF) 위기직후인 1998년(3361만명)과 1999년(3789만명)이었다.
우리나라 인구수를 감안하면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1년에 비행기를 한 번 이상 탔다는 얘기이다. “비행기 태우지 말라”는 말이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관용구 ‘비행기(를) 태우다’는 말은 ‘남을 지나치게 칭찬하거나 높이 추어올려 주다’ 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비행기를 타는 게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었다. 그런데 2017년~2019년 사이에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비행기를 타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사실 항공업계에서는 연간 항공여객수 1억명 돌파는 꿈의 숫자였다. 그런데 그 꿈이 K-LCC 등장과 K-LCC의 인식전환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코로나19 영향으로 해외여행이 봉쇄되자 우리 국민들이 국내여행으로 대체하면서 국내선 여객은 2021년에 전년대비 31.7% 증가한 3315만명을 기록하며 종전 최고치였던 2019년의 3298만명을 넘어섰다. 항공사별로는 기존항공사의 운송량이 2020년 대비 12.1% 증가한 930만명, K-LCC는 41.3% 늘어난 2385만명을 기록했다. 국내선 여객수에서 K-LCC 72%, 기존항공사 28%의 점유율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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