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핸드폰을 보면서 시간을 느낀다. 그러나 시계가 많지 않았던 100년 전 만 해도 소방서에서 발사하는 오포(午砲)소리를 들으며 점심시간이 되었음을 느끼곤 했다. 오포를 쏘아 시간을 알려주는 일은 소방대의 주요한 임무였던 것이다. 이것은 1924년부터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1982년까지 약 60년 동안 지속됐다.
시간을 알려주는 오포가 일상에 도입된 것은 1876년 개항 이후부터이다. 오포는 개항도시 인천에서 시작되었는데 1906년 2월부터 인천측후소 앞에 대포를 걸어 놓고 정오에 대포 한 방을 쏘았다.
경성의 용산에서는 1907년 4월에 호포위수조령(號砲衛戍條令)이 생기면서 포를 쏘아서 정오 시간을 알려줬다. 이때 오포를 담당했던 사람이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였다. 오포는 구용산 일본군 연병장에서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신용산을 향해 발사했다. 그러나 용산에만 오포 소리가 들리고 경성 시내에는 잘 들리지 않는다는 항의에 따라 경성 쪽을 향해 발사했다. 1920년에는 오포를 용산 효창공원으로 옮겨 발사했다.
1922년 워싱턴 군축조약으로 대포 사용이 제한되면서 군부대의 오포 발사는 경성부청에서 인수하게 됐다. 당시에는 시계가 보급되지 않았기에 우편국에 가야만 시간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오포를 설치해 시간을 알려주는 일은 관(官)의 주요한 업무이기도 했다. 오포 발사에는 많은 비용이 지출됐다. 사실 일본군 부대가 오포 발사를 그만둔 것도 이러한 비용 절감 측면도 있었다.
1922년 8월 14일 오포 발사를 경성부가 맡았을 때 매일 화약값 4원에다 포수 두 사람 인건비를 포함해 일년 2000원의 예산이 계상됐다. 여기에다 대포 구입비와 시계구입비 까지 1000원이 추가로 지출 됐다. 경성부에서는 비용과 조건을 고심한 끝에 오포 발사 임무를 경성소방서에서 담당하도록 했다.
오포는 시계가 일반화되지 않았던 당시 30만 경성시민의 시간을 담당했다. 그런데 정오에 발사하는 시간이 부정확하면서 경성시민들의 불만이 비등했다. 종현(현·명동)성당에서도 정오에 종을 쳐서 신자들에게 기도 시간을 알려 줬다.
그러나 오포가 하루에 3, 4초 정도 늦거나 빨라지면서 종현 성당의 종소리와 혼란을 가져왔다. 이런 점을 바로잡고자 인천 기상관측소에서 송신해 주는 시간을 경성우편국에서 받아 오포대가 있는 경성소방서에 전보로 송신해 줬다.
1924년 8월 11일부터는 오포 대신 기적을 사용하여 정오를 알리고자 경성소방서 망루에 기적을 설치했다. 이 기적은 무게만도 37kg이고 크기도 상당했다. 신식 전기 모터 음향으로 사방 2리까지 들렸는데 2리는 785. 45m 정도이다.
기적을 운영하는데 드는 비용은 1년에 500원 정도로 1920년 당시 100kg 쌀 25가마 정도였다. 그런데도 기적으로 울리는 비용은 오포를 운영하는 경비 2000원보다 25% 정도로 비용 절감적 측면이 있었다.
오포가 시간을 알기에는 더 좋았다는 여론이 있었지만 오포를 폐지하는 것은 시대적인 흐름이었다. 전국 주요 도시에서도 1000원 이상의 오포 비용 지출이 큰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인근 인천에서도 1924년에 오포를 폐지하기로 했다.
이렇게 시간을 알려주던 장비는 오포에서 기적으로 거쳐 점차 호적(號笛)이라 불리는 사이렌으로 변화됐다. 신호방법은 90초를 울려 정각정오에 사이렌이 끝나도록 하는 것이었다.
사이렌을 이용해 정오를 알려주던 일은 1945년 9월 7일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치안을 위해 정오뿐만 아니라 자정, 그리고 새벽 4시의 통금해제를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업무는 1982년 1월 4일부터는 전국적으로 통금이 해제될 때까지 소방서 고유한 업무로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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