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주의 문화인사이드] 우리네 삶,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

진실을 찾아낸 지혜로운 판결극 '회란기'
2023-06-01 06:26:02
법정에 선 두 여인은 어린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친자식이라고 주장한다.

지금이야 유전자 검사로 친자를 밝힐 수 있다지만 딱한 노릇. 재판관인 포대제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묘책을 던진다.

“석회로 동그랗게 금을 긋고 아이를 그 원 안에 세워라. 두 여인은 아이를 석회 원 밖으로 끌어당겨라! 자기가 직접 낳은 자식이라면 필사적으로 당겨 끌어낼 것이로되 자기가 낳지 않았다면 끝내는 빼앗기고 말 것이다!”

판결을 위한 절박한 상황에서 마부인은 아이를 힘껏 끌어내지만, 친모인 장해당은 끝내 끌어당기지 못한다. 결국 장해당은 억울한 종말을 맞아야 하는 것일까.

연극 '회란기'의 숨막히는 하이라이트 장면은 포대제의 지혜로운 판결로 권선징악의 막을 내린다. 이 작품은 중국 원(元) 대인 1200년 대 중반 극작가 이잠부가 쓴 ‘잡극(중국 전통 희극)’이다.

원제는 ‘포대제지감회란기(包待制智勘灰闌記)’. ‘포대제가 슬기롭게 석회로 원을 그려 판결을 내린 이야기’라는 뜻.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대표작 ‘코카서스의 백묵원’의 원작으로도 유명하다.

연극 <회란기> 

극의 줄거리를 살펴보자. 주인공 장해당은 빼어난 외모와 총명함, 다재다능함을 갖추었으나 가족의 생계를 위해 기생으로 팔렸다가 돈 많고 땅 많은 갑부 마원외의 눈에 들어 첩으로 들어간다.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아들까지 낳아 행복함을 누리는데, 본처인 마부인의 눈밖에 난 것이 문제였다. 장해당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불륜남과 작당해 남편 마원회를 독살하고 모든 죄를 장해당에게 뒤집어 씌운다. 아들까지 빼앗으려 동네 산파까지 매수해 거짓 증언을 하도록 모략을 쓴 것. 

장해당은 졸지에 남편을 독살하고, 재산을 편취한 누명을 쓴 것도 모자라, 자식까지 강탈당할 위기에 처했다.

장해당은 지독히도 억울하다. 상황은 진실을 밝힐 수 없을 것처럼 몰아친다. 처음 찾아간 관청의 판결은 이미 마부인에게 유리하기만 하다. 마부인이 관청까지 매수한 탓에 모든 것이 장해당의 잘못으로 조작됐고, 아들도 마부인이 낳은 것으로 인정됐다.

이 역경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한다는 말인가.

진실은 어둠 속에 묻히고 자식까지 빼앗길 위기에 처하지만 운 좋게도 재심은 명판관, 흔히 포청천으로 불리는 포대제가 맡아 진실을 밝힌다.

마 부인은 아이를 힘껏 끌어냈지만, 친모인 장해당은 차마 삼대처럼 가느다란 아이의 팔이 다칠까 힘껏 당기지 못했던 어미의 마음을 이해했고, 아이의 선택을 믿었다. 진실이 거짓을 이긴 셈이다.

700년이 지난 이 이야기는 아직도 우리에게 곱씹을만한 질문을 다시 던진다.

사회는 아직도 마부인의 손을 들고 있지 않는가.

포대인이 나오지 않았다면 진해당이 모든 죄를 뒤집어 썼을 터인즉, 우리 사회 역시 포대인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 것인가 말이다.

실제로 죄 없는 사람이 누명을 쓰고 감금됐다가 재심을 받아 풀려났다거나, 혐의를 받고 체포됐다가 뒤늦게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열 명의 범죄자를 잡지 못해도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는 만들지 않는다.’

우리나라 형사사법절차를 규정하는 핵심기조이다.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한 형사소송의 대원칙이다. 그러나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의문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그 이유는 권력을 가진 일부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힘없는 사람에게 죄를 만들어 씌우기 때문이다. 무고로 인한 고통은 고스란히 소시민들이 겪고 견뎌야 하는 몫이 된다.

극 중 “돈으로는 진실을 살 수도 있고, 거짓을 감출 수도 있거든!”이라는 대사는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처럼 아프게 느껴진다. 

삶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불완전한, 아슬아슬한 상황에 노출돼 언제 어디서든 공격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고 승리하며 정의가 살아난다는 희망이 있다. 진짜 엄마 장해당의 마음과 그것을 지켜본 포대제처럼.

억울함이 없는 사회, 바른 것이 바른 사회가 될수록 공동체는 아름다워진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우리가 함께 꿈꿀 때 비로소 삶에 대한 기대는 커진다. 

우리의 삶,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이유다.

글. 조현주 박사(문화콘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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